명문 가문의 도교 숭배
육수정(陸修靜)은 남조(南北朝)의 인물로 우흥 지방의 명문가인 노씨(呂家)의 후손이다.
육수정은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외모는 온순하고 밝고 명랑한 성격을 가졌다.
젊었을 때 그는 유교를 공부하고 다양한 문헌을 광범위하게 읽었으며 천문학과 지리를 광범위하게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문장을 공부하고 안으로는 조용히 도교를 수련했다.
육수정은 선을 사모하고 사모하여 훗날 집을 떠나 바람과 파도와 같이 사해를 배회하며 명산 대천을 유랑하였다.
형산과 나부지방을 거쳐 서쪽으로 양쯔강의 무협과 아미산에 이르렀고, 마침내 하늘이 움직이는 것처럼 통솔의 비결을 얻어 번창하게 되었다.
못생긴 것을 피하십시오
남조(南朝) 劉宋(유성) 元嘉(원가)(453) 말에 육수정이 지방 도성에서 약을 팔았는데 이때 송문사(宋文宗)가 문) 시작했다.
육수정의 도골선풍(道骨仙風)은 감탄스러웠다.
이에 송문문은 육수정을 태울 수 있는 아주 멋진 수레를 만들어주고 염복야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궁궐로 초대했다.
그러나 육수정은 송문화의 권유를 거절하고 옷깃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유소태자와 그의 동생인 시흥왕 유준이 반란을 일으켜 송문문을 암살하였다.
이것이 이야기가 말하는 “太初之亂”(태초의 과거)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육수정이 이 사건을 미리 예견하고 “악을 피하고 운 좋게 전진했다”(避凶就吉: 실혈의 길)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육수정의 힘은 아주 멋진 일이 되어 세상에서 많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내가 떠날 때 온갖 짐승들이 작별을 고해
육수정은 강남 일대를 유람하던 시절, 특히 금강산의 빼어난 풍광을 좋아했다.
대명(大明) 5년(461) 송효무제가 여산 백현봉 아래에 아름다운 오두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태사 3년(467) 송나라 명제(明帝)가 특명을 내려 경문돈왕을 보내어 유수정을 재판에 회부하게 하였다.
육수정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부름에 따라 수레에 올라탔다.
우리가 여산을 떠나던 날, 곰, 호랑이, 원숭이, 새들이 모여들어 길을 가득 메웠지만 그들의 슬픈 울음소리는 산 곳곳에서 그치지 않고 유수정이 여산을 떠날 때까지 따라갔다.
육수정이 경성에 도착하자 명제는 그녀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성허관과 통선대를 열고 아침저녁으로 도를 물었습니다.
초야의 선비들도 급히 그녀를 찾아갔고, 추종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육수정은 원찬처럼 기본기가 좋은 사람을 골라 그 중에서 모래를 휘저어 금을 가려내듯 제자로 받아들였다.
필요에 따라
陸修靜(육수정)는 숭허관(崇虛觀)에 머물며 각종 경전과 도교의 신비를 수집 보관하였다.
이 영향으로 느슨해진 세상의 바람은 점차 새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듬해 명제(명제)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육수정은 제단을 쌓고 상서로운 구름이 제단을 둘러쌌다.
다음날 명제병이 나았다 蒼梧王(창고왕) 元徽(원희) 2년(474) 계양왕 유휴범이 심양에 군사를 배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뒤 밭에는 죽은 백골이 가득했지만 육수정은 관을 마련해 백골을 하나씩 모아 묻었다.
그는 항상 이러한 좋은 일을 침착하고 질서 있게 처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육은 수정에게 산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희 5년(477) 정월 어느 날, 류수정은 제자들을 모아 “황명과 황은 때문에 오랜 염원을 깨뜨렸다.
나는 여산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먼저 거기에 가서 준비해야 한다.
”
같은 해 3월 2일 육수정은 72세의 나이로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시체에서 밝은 빛이 발산되었고 이상한 맑은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제자들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온갖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상서로운 구름이 떴지만 잠시 후 가는 곳마다 모두 흩어졌다.
포대 하나만 바위에 매달렸습니다.
육수정은 죽음을 각오하는 유언을 남기고 시신을 이 자루에 담아 그곳 계곡에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양한 도교 경전 편집
사실 욱수정 이전에는 각종 도교 경전에 참과 거짓이 혼재되어 있었고, 류수정은 광범위한 경전을 수집하고 분류하였다.
경주(경과 계), 방약(예방의학), 부도(부도) 등 1,280권의 책을 편찬하여 전 세계적으로 100여종의 상법을 편찬하여 후손의 기준.
당시 조정은 육수정의 도교를 높이 평가하여 시호를 간적선생(簡寂先生)이라 하였다.
그 후 송나라 혜종 원년(1119)에 유수정을 “丹元眞人”(단원진인)으로 봉인하였다.
지금도 여산에는 육수정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산 서쪽 산골짜기 개울가를 따라 육수정이 계곡에 시신을 던지라고 명한 산꼭대기 이름인 포낭봉(布囊峰)이 남아 있다.
육수정이 은거하던 문 밖에는 분수(煉丹井)와 연리수(連理樹)가 있다.
그가 도를 행한 움막은 팔 높이 이상의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나무들의 뿌리가 여기저기 얽혀 있다.
石磬(석경)이라는 돌도 있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다고 한다.
또한 각종 약초가 자라난 곳에서 약초가 자란다고 하며, 산골짜기에는 대나무가 흔하다.